『수서(隋書)』(636)에 나오는 ‘류구(流求)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류구의 존재가 중국과 일본에 알려지는 7세기경이 갈림길이었다.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대륙세력의 생산력 발전이 해양세력을 앞지르기 시작한 때였다.사쓰마에 정복당한 사실을 명나라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애를 썼다.황제가 보내주지 않아도 수요는 공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1392년에 명 홍무제가 푸젠성 주민 36가구를 보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사상계에서 구메무라의 역할이 워낙 크고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다.
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
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
[사진 위키피디아] 타이완 원주민의 언어가 남양어족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확인되어 있다.학술과 문화의 본산으로서 많은 학자-관료를 배출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crab claw sail)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outrigger)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1609년 정벌에 항복한 왕과 신하들이 사쓰마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받았을 때 단 한 명 거부하고 처형당한 대신이 있었다.